“오늘은 여러분들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은 일 중 너무나 답답하고 억울하고 속상했던 기억을 되살려 글로 써보기로 해요. 선생님한테 이야기하듯이 써도 되고, 일기 형식으로 써도 좋아요. 여러분에게 억울한 마음을 갖게 만든 사람에게 편지를 쓰듯이 글을 써도 됩니다. 다른 사람이 읽어보고 ‘정말 억울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 가장 좋은 글이겠죠”

9일 서울 중랑구 망우3동 면일초등학교 3학년10반 교실. 20년 가까이 아이들한테 글쓰기 교육을 해오고 있는 담임 김익승 교사가 아이들에게 글쓰기 주제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김 교사는 “생각나는 일이 없는 사람은 안 써도 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김 교사는 이어 책꽂이에 꽂혀 있는 글쓰기 책에서 보기글을 골라 아이들에게 읽어줬다. 10여년 전 5학년 아이가 쓴 ‘어른들도 어린 시절 겪었을 텐데’라는 글이다. 할머니 돈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매를 맞은 억울한 심정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글이다. 보기글 읽기가 끝나자 아이들은 2~3분 동안 눈을 감고 기억을 되살린 뒤 종이에 얼굴을 파묻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5분도 채 안돼 글쓰기를 끝내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수업이 끝날 무렵까지 글쓰기에 몰두해 A4 용지 한 면을 가득 채우는 아이도 눈에 띄었다. 아이들은 자기 말은 믿지 않고 언니와 동생 말만 믿는 엄마에 대한 서운한 심정부터 용돈과 관련해 가족들의 오해와 의심으로 속상했던 기억, 반 친구 중 싫은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 등 저마다 마음 속에 감춰 뒀던 이야기들을 털어놨다.

엄마한테 서운했던 일

싫은 친구에게 하고픈 말

미주알고주알 쓰다보니

“기분도 상쾌해지고

쓰는게 재미있어요”

이 반 아이들은 매주 한 시간씩 계발활동 시간에 이렇게 글쓰기 수업을 한다. 계발활동 시간 말고도 수업이 일찍 끝나거나 공부가 지루해질 때면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글을 쓴다. 김 교사가 옛날 이야기나 재미있는 노래를 들려주면 느낌을 쓰기도 하고 어른들에게 하고 싶은 말로 노랫말을 만들어보기도 한다. 점심 시간에는 수시로 아이들이 의자 위에 올라가 자기 글을 발표하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글 맛보기’ 시간도 마련한다.

김나영(10)양은 “글을 쓰다보면 마음이 글 속의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아 답답했던 마음이 풀리고 상쾌해진다”며 “학기 초에는 글쓰기가 어려웠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글쓰는 재미가 생겨 글도 잘 써진다”고 말했다.

△ 9일 서울 면일초등학교 3학년 10반 교실에서 김익승 교사가 글쓰기 수업의 주제에 맞는 보기글을 골라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있다.

아이들이 이렇게 글쓰기를 즐기게 되기까지는 김 교사의 노력이 큰 몫을 했다. 우선 이 반 교실에 들어가면 벽을 빼곡하게 에워싸고 있는 온갖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글쓰기 이론서와 또래 아이들의 글 모음집, 만화, 동화 등 900여권에 이르는 이 책들은 모두 김 교사가 집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김 교사가 1986년부터 만들어 온 학급 문집 <배워서 남주자>도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특히 또래 아이들의 삶이 진솔하게 담겨 있는 다양한 글 모음집은 아이들에게 글 쓰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켜주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또 교실 한쪽 벽에는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쪽지에 써 붙이는 ‘선생님 할 말 있어요’와 ‘얘들아 내 말 좀 들어봐’ 게시판이 있고, 그 바로 밑에는 김 교사가 쓰는 ‘선생님 일기’가 걸려 있다. 교실 뒷쪽 벽에는 아이들 글 중 좋은 글을 골라 차곡차곡 붙이는 ‘참 삶을 가꾸는 글쓰기’와 ‘우리는 모두 시인이다’ 게시판이 있다. 교실 전체를 글쓰기 공간으로 꾸민 셈이다. 이렇게 교실 곳곳에 붙여놓은 글들은 그 자체가 아이들에게 훌륭한 맛보기 글이 될 뿐만 아니라 ‘저런 글이라면 나도 쓸 수 있다. 한 번 써보자’는 생각이 우러나게 한다.

김 교사는 “아이들이 자기가 날마다 보고 듣고 겪는 일을 솔직하고 자세하게 쓰는 것이 가장 좋은 글쓰기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억울한 심정과 걱정거리 등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들을 글로 토해내면서 맺힌 마음이 풀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면 누구나 글을 쓰고 싶어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이종규 기자 jklee@hani.co.kr>jklee@hani.co.kr 한겨레 신문 2003년 6월 15일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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